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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정보

[인천/소래포구] 소래포구의 흘러간 옛 노래

'소래포구의 흘러간 옛 노래'라고 제목을 붙여보았는데 혹시 이번 소래포구 포스팅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짐작하셨나요? :) 바로 소래포구에 얽힌 옛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보려고 합니다. 다른 재래시장에도 많은 옛 이야기가 있겠지만 그 중 이곳 소래포구는 우리의 구한말, 즉 근현대사, 일제시대, 그리고 6.25전쟁과 관련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곳입니다. 어시장이라는 것만 본다면 싱싱한 해산물을 봉지 가득 사다가 가족들과 함께 먹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겠지만 소래철교 등 소래포구의 옛 이야기를 듣노라면 지나간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워낙 해산물을 많이들 사러오는 소래포구이니 해산물이나 회 이야기는 다른 분들도 익히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은 회 한 점 먹으며 회상해보는 이곳의 옛 흘러간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네이버 지도 파노라마 서비스를 이용해 본 소래포구의 전경입니다. 빨간 화살표가 되어 있는 곳부터 그 왼편으로 소래철교(짧은 다리)가 있는 곳까지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천을 경계로 소래포구가 있는 위쪽은 인천 남동구, 아래쪽은 경기도 시흥시 입니다. 소래철교를 건너갔다오면 인천과 경기도를 한번에 다녀온 것이지요. 

소래포구의 어시장은 아픈 과거로부터 생겨났습니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화학 원료인 소금, 그중에서도 품질이 좋은 소금을 일제가 수탈하고자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곳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자동차들이 오가는 도로 왼쪽으로 지금은 소래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소래포구 주변 일대는 과거 소래 염전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된 뒤에 실향민들이 배 몇 척으로 새우잡이를 시작하면서 소래의 질 좋은 소금으로 젓갈을 만들어 인천과 서울, 경기도 등으로 지고 나가 팔면서 소래포구에서의 삶이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 입니다.


소래포구 입구 한 켠에 전시되어 있는 초기 증기기관 형식의 협궤열차입니다. 지지난 포스팅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현재 수인선이 새로 건설중이며 폐선구간에 속했던 소래역도 곧 새로운 모습으로 지어질 예정입니다. 이 증기기관은 1978년에 디젤열차로 바뀌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디젤열차로 바뀐 후의 협궤열차 모습입니다. 8.15 광복 후 60년대 초까지 협궤열차는 이 증기기관차로 여객 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15개 역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습니다.


인천시청홈페이지에서 찾은 사진이며 사진 속 철교가 바로 소래철교입니다. 지금의 소래포구와 소래철교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네요. 아마도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이 오봉산인 듯 합니다. 지금은 그 앞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어 산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열차 뒤로 매달려 계신 아주머니의 모습이 위태로워보입니다. 그 앞쪽의 문에도 역시 사람이 나와서있는 모습을 보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포구의 모습이 어땠을지 .. 궁금함을 자아냅니다. 
좁은 철교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협궤열차 .... 태풍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과연 열차가 운행을 했을지 ... 이 또한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한 가지 덧붙여서....일제시대때 한창 태평양 전쟁을 치러야했던 일본은 1937년 수인선 철도를 건설하여 소래포구의 소금과 곡물을 인천항까지 실어나른 후 일본으로 수탈해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 당시에는 이 열차를 '수탈의 열차'로 불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대중교통 수단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열차 안에서는 어민, 상인, 통학생들이 어울려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도 적지 않았고 이 열차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소래포구의 어민들도 포함되어 있겠지요.


1995년 12월 21일, 폐선되는 구간의 협궤열차를 탑승하러 갔었습니다.

사진 속 지도에서 소래역을 찾으셨을겁니다. 남인천역이 현재 인천 남구 용현5동 부근이구요. 송도역은 지금의 송도신도시와는 전혀 다른 위치입니다. 아마도 송도신도시 건너가는 다리 앞 부근 일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20년전만 하더라도 송도역사 건물을 차타고 지나가면서 볼 수 있었고 .... 소래역 역사 예전 건물은 자라면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1995년 협궤열차를 탔을 당시는 한대역에서 수원역 구간이 폐쇄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수원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잔설이 쌓여있는 한대역에 갔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 사진이 한대역에서 찍은 협궤열차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와의 헤어짐을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 마냥 아쉬워했었습니다. 깊게 패인 주름에서 세월을 알 수 있었던 어떤 노신사분은 열차를 쓰다듬으며 우시기도 했구요 .... 이 포스팅을 위해 그때의 사진들을 꺼내보면서 저도 괜시리 아련해집니다.


뒤로 보이는 협궤열차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열차번호 '9165' 열차 주위 플랫폼 바닥에 잔설이 흩어져있습니다. 
이 협궤열차는 1995년 12월 31일 오후 8시 마지막 기적소리를 토해내고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1937년 3월 첫 운행을 한지 58년만이었습니다. 1994년도까지는 남인천역에서 수원역까지 운행했었고 1995년 운행구간은 수원과 한대역이었습니다. 그 후 철도법 제7조에 의거 1996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중지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어렵게 소래역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구했습니다. 사진은 인천에서 오래 사신 의사선생님의 블로그에서 구했습니다. 소래역은 1994년 9월에 폐쇄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소래역의 모습은 기억이나질 않습니다. 아마도 소래역이 있던 자리는 지금 새로 짓는 소래역사 건물 자리나 그 근처가 아닐까합니다.

단지 2량의 열차를 달고 뒤뚱거리며 최고 시속 55km로 달렸을 사진 속 수인선 협궤열차.
'꼬마 열차'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했었습니다.

저희 외증조부모님, 외조부모님, 부모님, 그리고 저까지 4대에 걸쳐 이용했던 협궤열차와 소래역. 비록 저는 당시 어렸던지라 소래역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해지길 바라봅니다. 관광지로만 알았던 소래포구에 이처럼 깊은 역사가 자리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 :)


예전 소래 염전이 있던 자리나 소래역이 있던 부근은 이렇게 새로 정비가 되어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매우 울퉁불퉁했던 길이며 흙길들도 아스팔트로 깔끔해졌지만 어딘가 네모반듯한 건물은 소래포구의 이미지와는 다소 동떨어져있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대형간판과 시멘트, 아스팔트로 덮혀버린 소래포구 시장 앞쪽이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기억속 소래포구의 모습은 덮지 못한듯합니다.

왜냐하면 저희 외할머니께서 6.25전쟁때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있는 동인천에서 소래포구까지 피난길에 오르셨었기 
때문입니다. 외할아버지와 따로 피난길에 오른 외할머니는 당시 갓난아기였던 둘째이모와 5~6살쯤이었던 첫째이모를 데리고 소래포구까지 걸어오셨다고 해요. 이곳에서 배를 타셨는지 아니면 다시 걸어서 다른 곳으로 가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때 외할머니께는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거동을 할 수 없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계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난을 가야하는데 시어머니, 즉 저의 외증조할머니께서는 당신이 걸으실 수 없으니 외할머니께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라고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두 이모들을 데리고 소래포구까지 걸어오셨다가 외증조할머니가 너무 걱정이 되어 이곳에 있던 주막같은 곳에 피난가는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는데 여기에 잠시 이모들을 맡기시고 다시 동인천으로 가셔서 외증조할머니를 모셔왔다고 합니다. 당시 동인천에서 소래포구에 이르기까지 전투기의 폭격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고 하는데 .... 

일제시대와 더불어 6.25전쟁까지 .. 우리네 애환의 역사가 항상 활기가 넘치는 이곳 소래포구에 담겨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시계바늘을 앞의 사진들보다 조금 더 앞으로 당겨 사진 속 포대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저곳의 정확한 명칭은 '장도포대지'입니다. 위치는 소래철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있으며 팻말이 있으니 찾기 쉬울 것 입니다. 장도포대지가 생긴 때는 고종 16년인 1879년입니다. 아마 인천분들이라면 화도진을 많이 들어보셨을겁니다. 인천 동구 화수동에 있는 화도진은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인데 이 화도진을 축조할 당시 함께 만든 곳이 바로 장도포대지입니다. 서양의 이양선의 접근을 막고자 인천 앞바다에서 서울로 통하는 이러한 인천 포구 곳곳에 포대진지를 구축하였지요. 이곳 장도포대지는 일제시대때 철도공사로 인해 없어졌다가 2006년에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옆으로 아담한 산책 공원도 같이 조성되어 소래포구를 찾는 관광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포대지에서 느꼈졌을 긴장감과 천둥같은 소리로 이양선을 막아냈을 대포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고 다만 그 흔적만이 남아 우리나라의 구한말 시대에 어떠한 일이 있었노라 작게 속삭이는 듯 합니다.


소래철교로 들어가는 입구 한켠에서는 장사가 한창입니다. 옛날에는 여기 입구도 모두 철로로 이어졌던 곳인데 지금은 철로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글로나마 써둔다며 이곳 또한 철로가 있었던 곳임을 잊지 않고 전할 수 있겠지요. :)


소래철교를 건너 반대편 시흥 쪽에서 바라본 소래포구의 모습입니다. 소래철교 또한 지금은 철로의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래포구 뒤로는 오봉산 자락이 이제는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는군요. 그 앞자리를 차지한 건설장비와 아파트들이 포구에 정박되어있는 어선, 갯벌과 .. 묘한 조화를 이루고있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보는 느낌입니다. 


이 사진이 바로 증기기관을 이용했던 때의 협궤열차모습입니다. 힘차게 연기를 내뿜으며 소래철교 위를 달리고 있군요. 저 철교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6.25 전쟁 때도 이 위를 지나다가 빠진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 지금처럼 철교 난간에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도 겨우 두 명 지나다닐 너비인데 그 전에는 좀더 좁은 철교에다가 양쪽에 난간도 없었으니 ... 실제로 그 철교위를 건널때는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했습니다. 중간쯤 건너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 
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래포구에서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곧 개관할 소래역사관에는 아마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들이 이 곳에 담겨지겠지요. ^ ^ 늘 우리들의 삶 가까이에 있는 재래시장이라 그 특별함을 평소에 깨닫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귀 기울여본다면 우리가 충분히 놀랄만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얽혀있는 곳이 재래시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알고 난다면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연인 혹은 친구와 나들이를 하러 오신다면 이야기들을 통해 조금 더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소래포구 방문이 될 수 있도록 이곳에 숨겨진 다른 옛 이야기들을 한 번 찾아보세요. :) 그렇다면 더욱 많은 것을 이곳에서 얻어가실 수 있지 않을까요.